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베델 보카사 (문단 편집) ==== 초호화 대관식 ==== || [[파일:보카사 1세의 대관식.jpg|width=100%]] || || [[파일:imagetime.jpg|width=400]] || [[파일:external/www.jeremyhunter.com/057.jpg|width=400]] || ||<-2> 황제로 즉위한 보카사와 황후가 된 그의 아내 카트린 뎅기아데. || || [youtube(2_74Hh35jk0)] || [youtube(bwzgOKZzLM4)] || ||<-2> 보카사 1세의 대관식 당시 실제 영상 || 이후 보카사는 제국 선포 만 1주년이 되는 [[1977년]] 12월 4일에 [[사치|약 2200만 달러에 이르는 경비를 지출]]한 초호화 [[대관식]]을 마련했다. 이 대관식은 1930년에 에티오피아의 정식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의 즉위식 이후 무려 '''47년'''만에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대관식이었다. 이 날짜는 1804년 12월 2일에 거행된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영향을 받았는데, 보카사는 나폴레옹을 존경했기 때문에 대관식 날짜를 이틀 미뤘던 것이다. 이 대관식에 든 금액을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약 1억 860만 달러, 대략적으로 환산해도 '''1303억 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는데, 이는 당시 1년 국가 예산의 1/3 정도였고, 1년 총수출액의 1/4, 심지어 당시 국가의 GDP[* 1977년 기준으로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GDP는 약 5.1억 달러도 되지 않았다.]의 '''약 18%'''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거기다가 보카사는 [[프랑스]]가 개발 목적으로 지원해 준 원조금 전액을 대관식에 쏟아부었다. 참고로 이 시기 제국 일반 국민들의 1인당 소득은 [[세계은행]]의 추산으로는 216달러였는데, 이는 2023년 환율로는 약 1066달러 정도이다. 그런데도 이 대관식을 위해 제국 내 기업들은 물론, 공무원들조차 대관식 경비로 쓰기 위해 원래 받아야 하는 봉급 중 40달러를 강제로 보카사에게 헌납해야 했다. 이 대관식을 위해 수도 [[방기(중앙아프리카공화국)|방기]]의 거리는 정비되고, 건물의 도색도 새롭게 했으며, 거리의 거지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대관식 준비를 위해 특별 위원회도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고증하여 보카사 황제의 대관식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즉위했을 당시와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행해지도록 연출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당시 세세한 증언들과 기록들까지 참고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이 대관식을 위해 보카사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1953년)과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대관식(1967년) 영상까지 참고했다. 실제로 보카사는 온도가 35도가 넘고 습도가 90%에 달하던 이 대관식 날에 6천석 크기의 [[방기(중앙아프리카공화국)|방기]]의 실내운동경기장에서 대관식을 치를 때 이 그림을 모방하여 보카사 본인이 가장 총애하는 부인이자 유일한 황후로 결정된 카트린에게 왕관을 직접 씌워줬으며, 대관식 후에는 방기의 대성당에서 대관식 미사를 올렸고, 미사 후에는 400명 정도가 참여하여 궁전 근처의 정원에서 열린 만찬과 무도회가 이어졌다.[* 만찬 당시에 궁전의 정원은 보안상의 이유로 방탄 유리 스크린으로 뒤덮였다고 한다.] 대관식 바로 다음날인 12월 5일에는 방기에서 경축 군사 퍼레이드를 열었는데, 여기에 참여한 병사들 역시 나폴레옹 1세 시대의 모습을 재현한 제복을 입었다고 한다. 이 군사 퍼레이드 후에는 농구 토너먼트 등의 스포츠 행사들이 열렸다. 당연히 이에 대해 자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황후조차 황제 즉위식을 격렬히 반대한 나머지 보카사가 다른 여자를 대관식에 대동해야 할지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외신에서나 타 국가, 자국 내에서도 미쳤다거나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를 대신해서 황제가 될려고 하냐는 식의 비웃는 반응이 많았기 때문에 외빈 초청은 보카사 1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교황 [[비오 7세]]를 직접 파리까지 '''납치'''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을 했던 나폴레옹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자신을 [[파문]]한 교황을 납치해 강제로 데려온 것이다. 그래서 상술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대관식 그림에서도 교황은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에게 직접 관을 씌워준 것과 달리 옆에 뚱하니 앉아서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비오 7세가 나폴레옹에게 굴하지 않고 유폐와 감금생활을 버틴 것으로 인해서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으니 보카사가 교황 못 데려왔다고 비난받기에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를 데려오는 것부터 실패했다. 당시 교황 대사 오리아노 퀼리치는 "교황께서는 연로하셔서 그리 먼 길은 못 가십니다"라고 보카사를 설득했고[* 실제로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바오로 6세는 대관식 약 8개월 뒤인 [[1978년]] [[8월 6일]]에 선종한다.] 결국 방기 대주교와 교황 특사가 참석하는 선에서 마무리됐고, 이 때문에 보카사는 자신이 직접 왕관을 쓰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은 비오 7세를 대관식에 끌고 와서는 '''자기가 직접 왕관을 썼다.''' 보카사는 본의 아니게 자신이 그렇게 존경해 못지 않은 나폴레옹과 같은 방식으로 관을 쓰게 된 것이다.] 보카사는 군주제를 만들면 고국이 눈에 띌 것이고 세계의 존경을 받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믿어서 해외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위업을 직접 와서 보라는 듯이 총 2500명에게 대관식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 중 초청에 응한 사람은 기자 100명을 포함한 600명밖에 없었으며, 특히 외국 군주와 국가원수는 '''단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당시 황제를 칭하고 있던 두 나라인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과 [[이란]]의 [[팔라비 2세]]를 데려오기 위해서 상당한 로비를 했지만, 막대한 외교비용만 낭비해서 외교가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가봉의 [[오마르 봉고]], 우간다의 [[이디 아민]]도 핑계를 대가며 대관식 참석을 거절했다.] 각국은 그냥 주재 대사를 특사로 참석시키거나, 격이 떨어지는 인사들을 특사로 보냈다. 그나마 [[모리셔스]]의 [[시우사구르 람굴람]] 수상과 [[모리타니]]의 다다 대통령은 영부인을 대신 보내줬으며, [[리히텐슈타인]]에서는 왕자 1명을 특사로 보냈다. [[대한민국]]도 [[이용희(1917)|이용희]] [[통일부|통일원]] 장관을 특사로 보냈다. 물론 보카사는 해외에서 국가원수들이 아무도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정신승리|그들이 나를 질투해서 그런 거다. 난 제국이 있지만 그들에겐 제국이 없거든.]]"이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당시 대관식에 쓰인 사치품 명단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았다. * 6m 길이의 붉은 비단과 흰 모피, 표범 가죽으로 만든 뒤 금실로 태양과 별, 독수리를 새긴 후, 거기에 진주 78만 5천 개와 크리스탈 비즈 122만 개를 덧붙인 145,000달러짜리 9m 길이의 예복. 나폴레옹의 대관식 당시 제복을 수놓은 회사와 같은 회사에 특별 주문했고, 110명의 재단사들이 이 옷을 만드는 데에 동원되었다. 황후의 제복을 만드는 데에도 72,400달러나 들었다. * 진주로 자수가 짜진 신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신발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였다고 한다. * 다이아몬드를 끼운 2m 길이의 순금 지팡이와 보석이 박힌 도금된 검. * 128면체로 세공된 8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1개를 포함한 엄청난 양의 보석으로 장식한 250만 달러짜리 순금 왕관. 엘리자베스 2세의 왕관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왕관의 상단은 진홍색의 비단 캐노피와 금으로 아프리카의 지도를 새긴 푸른 지구 모형으로 장식되었다. 이 왕관을 장식한 보석이 어느 정도로 많았냐면, 매 기록마다 이 왕관의 장식에 사용된 보석의 수치가 달라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 250만 달러를 들여 만든 나폴레옹의 독수리를 본따 금을 도금한 2t짜리 청동 독수리 옥좌. 높이는 약 3.5m, 너비는 약 4.5m에 달했으며, 이 옥좌를 만드는 데에 30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참고로 이 옥좌는 보카사가 쫓겨난 후에 군중들에게 돌팔매질당한 후 금이 모두 약탈되어 철제 뼈대만 남은 채 궁전 안뜰에 버려지게 되었다. [[https://s.observers.france24.com/media/display/6cb31bb8-f72d-11ea-9201-005056bfe576/13567439_1137932229603584_6058072660493480568_n.webp|2015년에 찍힌 사진]]]. *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 다이아몬드에 아프리카 대륙을 새겼다. 참고로 보카사는 실제 가치가 당시 가치로 500달러 정도인 이 반지에 대해 50만 달러를 청구한 다이아몬드 판매자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 대관식 초청 인사들을 위해 신분, 직업별 색깔을 지정해 제국 내에서 맞춤 제작한 수백 벌의 옷. * 대관식 후 할 만찬을 위해 유럽에서 공수해온 240t 이상의 신선한 식료품들과 1병에 최고 22만달러 까지 호가하는 명품중에서도 명품 와인인 1971년산 샤토 무통 로쉴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적포도주를 꾸준히 엄선해 생산하고 있는 '[[루이 14세|태양왕]]의 포도주' 라고 불리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 각각 4만 병, 모엣 & 샹동 샴페인, [[조니워커]] 스윙, [[시바스 리갈]] 각각 2만 4000병.[* 참고로 보카사는 시바스 리갈을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하루라도 시바스 리갈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고, 중요한 외교 행사와 심지어는 '''대관식 전날'''에도 [[보리스 옐친|시바스 리갈을 폭음하다가 술에 취해 쓰러진 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대관식 전날에 보카사를 본 카트린은 술을 모두 하수구에 버린 후 ''''황제가 될 사람은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돼요!''''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요리사 200명을 초청해 왔다. 대관식 만찬은 이란산 [[캐비어]](오르되브르, 캐비어 통은 2명의 요리사가 날라야 했을 정도로 컸으며, 이 대관식을 위해 45kg의 캐비어를 수입했다.)를 시작으로 랍스터 페이스트리 롤(앙트레), 철갑상어 요리(생선), 그랜드 베니어 소스를 곁들인 영양고기(포유류), 푸아그라(조류), 대관식 케이크(디저트) 순으로 제공되었다. 대관식 케이크는 니스에서 특별히 제빵사를 공수해 만든, 초록색 아이싱으로 장식된 4피트(1.2m) 높이와 3피트(0.9m) 너비의 7층짜리의 거대한 케이크였고, [[https://res.6chcdn.feednews.com/assets/v2/26423afb91578dfb9756d1c58aa7a148?quality=uhq&format=webp&resize=720|제국의 문장]]과 독수리가 앉아 있는 해가 위에 있는 초콜릿 기둥들이 케이크를 돋보이게 했고, 케이크를 반으로 자르자 비둘기 여섯 마리가 날아올랐다. * 귀빈 접대용 은식기와 황제를 포함한 황실 가족들이 사용할 보석이 박힌 금식기 각각 1만 개 * 황제 부부 앞으로 던져질 장미 꽃잎 450파운드, 튤립 25만 송이를 포함한 꽃 7톤 * 대관식 다음 날로 예정된 퍼레이드에 쓸 도금 마차를 끌 벨기에산 백마 8마리.[* 이들은 대관식 후에 아프리카의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고 한다.] 근위병들에게도 노르망디산 회색 말을 타고 황제의 마차를 호위하게 했다. 이 말들을 위해 병사 30명이 프랑스에 파견되어 수개월간 말 조련법을 수련받았다. * 같은 행사에 쓸 벤츠 신제품 60대. 중앙아프리카 제국이 [[내륙국]]이여서 [[카메룬]]의 항구로 운송한 후 비행기로 중앙아프리카 제국까지 운송해 운송비만 1대당 5천 달러로, 총 30만 달러가 나갔다. 보카사의 차는 흰색 가죽으로 되어 있는 데다가 전화, 샴페인이 있는 미니 바까지 설치된 [[메르세데스-벤츠 600]]이었다. * 프랑스의 작곡가에게 의뢰한 대관식 전용 행진곡과 대관식 만찬 후의 무도회에서 쓸 왈츠. 참고로 왼쪽 영상의 배경 음악이 '대관식 행진곡'이다.[* 참고로 오른쪽 영상에 쓰인 아동 합창곡은 원래 기독교 찬가로 쓰인 곡이 보카사의 대관식을 위해 전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프랑스의 시인에게 의뢰한 대관식 송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오늘, 위대한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 어딘지 압니까? >프랑스의 기독교 정신이?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이? >그곳은 바로 방기, 라코케트(la Coquette)입니다. >---- >[[클로비스]] 대왕의 후계자 >그리스와 갈리아의 영웅들 >[[샤를마뉴]]와 [[루이 9세|성왕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보나파르트]]와 [[샤를 드골|드골]]. >---- >보카사, [[아우구스투스|시저 아우구스투스]]입니다. >프랑스의 가장 저명한 인물! >그의 흉상 앞에 엎드립시다. >어디에서나 그의 호의를 축하합시다. >---- >새로운 보나파르트, 보카사 >그의 저명한 도시, [[방기(중앙아프리카공화국)|방기]] >로마, 아테네, 스파르타는 일식으로, >그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 독일의 화가에게 의뢰한 실물 크기의 보카사의 공식 초상화 2점 * 외국에서 공수한 불꽃놀이 도구. 불꽃놀이는 대관식 만찬 후 35분 동안 치러졌다. * 상술한 물품들을 나를 대형 수송기 22대. 모두 외국에서 임대한 것들이었다. * 경호를 위해 프랑스에서 데려온 헌병대들. 대관식에 쓸 장신구 제작에만 1977년 기준으로로 총 500만 달러가 들어갔다고 하며, 대관식에 쓴 복장과 장신구 디자인과 제작은 다 프랑스 본토에 있는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거기다가 대부분의 비용을 프랑스가 부담했기 때문에, 중앙아프리카 제국은 프랑스에 막대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 여하튼 당시 언론은 이 대관식을 '식민주의의 사슬을 끊고 독립한 아프리카가 새시대를 맞이하여 선조들의 위대한 생활양식으로 복귀했음을 세계 만방에 고한 행사였으며 아프리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자화자찬했으며, 보카사 1세 황제에게는 '존엄하신 보카사 1세 황제 폐하, 평화의 사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 황제이자 중앙 아프리카의 원수(His Imperial Majesty Bokassa the First, Apostle of Peace and Servant of Jesus Christ, Emperor and Marshal of Central Africa)'라는 길고 화려한 수식이 붙었다.[* 참고로 [[우간다]]의 [[이디 아민]]도 이런 호칭을 좋아했다.] 보카사는 이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호화스러운 대관식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에 "위대한 역사는 희생 없이는 창조할 수 없다. 민중은 희생을 달게 받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보카사가 말했던 '위대한 역사'는 2023년 기준 [[취약국가지수]]는 뒤에서 8등, 2023년 기준 1인당 GDP 순위는 뒤에서 6등, 2021년 기준 [[인간개발지수]] 순위는 뒤에서 4등, 2022년 기준 세계기아지수 순위는 뒤에서 2등이라는 '비참한 역사'로 돌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